First Solo Exhibition첫 개인전
Saeksaekkkal Jooboram색색깔 주보람
2024.03.29 – 04.13 · Arting Gallery, Seoul아팅, 서울
Foreword전시 서문
독창적인 색감과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화면을 통통 튀는 3음절 단어에 담았다. 색색깔 주보람
Her singular color sense and her light, rhythmic surfaces went into one bouncing three-syllable word: Saeksaekkkal Joobo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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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제목으로 뾰족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아, ‘제목미정’으로 쓴 판촉용 임시 포스터를 제작해서 공지했다. ‘제목미정’이 일으킬 호기심 효과도 있고, 가느다란 실선을 차곡차곡 손으로 쌓는 주보람의 조형에 우연성이 커서 ‘제목미정’을 전시 제목으로 써도 통할 것 같다는 아팅 공동운영자의 의견도 있었다.
선 원 세모 같은 도형과 색채처럼 조형의 본질에 집중한 주보람의 작품세계는 의미를 따지기 앞서 직감으로 오호가 결정되는 만큼 ‘제목미정’이란 제목도 괜찮겠다 싶었다.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는 작품에 진중한 의미가 숨어있다는 통념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 편이다. 그래서 의미나 개념보다 조형의 기본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주보람은 언어 너머의 직감과 연관된 미술의 특성과 연관이 깊다고 봤다.
그렇지만 의미나 개념보다 첫 인상으로 승부를 건 미술가 그룹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개인전 제목엔 주보람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독창적인 색감과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화면을 통통 튀는 3음절 단어에 담았다. 색색깔 주보람
가녀린 색선을 층층이 쌓아 추상같은 화면을 만들거나, 부릅뜬 두 눈이나 반쯤 저문 태양, 무지개를 닮은 반원형으로 귀결시킨 그림은 주보람의 색감色感 연대기를 통틀어 대표 도상이다.
주보람 색감 연대기의 초입에는 인물을 비범한 색채에 담은 구상회화가 놓여 있다. 고갱의 타히티 시절 화풍처럼 열대 야생의 원시 색감을 인물에 입히거나, 분할된 면들로 조합된 피카소 풍 얼굴 그림도 보이며, 빨간색 배경에 터키색 안면과 노란색 목을 지닌 형광 채색이 강렬한 모던 걸의 트렌디한 초상화까지.
주보람의 작품세계의 한 축이 색채 감각이라면, 실선을 층층이 쌓는 구성이 다른 축이다. 그녀의 화면은 나무의 연식을 드러내는 나뭇등걸처럼 대상의 단면斷面처럼 보이며 나아가 사물의 본질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보람의 그림은 비좁은 화폭과 실처럼 가는 선들과 감각적인 색채 감각이 밀도 높게 결합된 총체다. 그녀의 작은 미술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p.s. 이상은 작가노트를 접하기 전 내가 작품에서 받은 직감을 단문으로 요약한 거다. 작가노트(“ ” 표시)를 인용한 부록은 아래와 같다.
“한 줄 한 줄의 드로잉은 하루, 혹은 순간에 대한 비유로 느껴졌다.”
RE: 층층이 쌓인 색선을 나무 나이테에 비유한 내 표현과는 통하는 셈이다.
“뾰족한 삼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세워져 있는 그림이 많다. 무의식적으로 어떤 정상, 절정에 도달한 찰나의 순간을 종이에 영원히 박제해두는 것이다. 문제는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을 때다. 절정의 순간 뒤에는 언제나 하강이 예정되어있다. 문제는 내려갈 때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가이다.”
RE: 작품의 의미보다 색채와 도형 같은 조형의 기본에 집중한 점을 주보람 미학으로 나는 위에서 풀이했지만, 삼각형과 동그라미로 구성한 그녀의 대표 도상에도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했다고 작가는 답한다.
No sharp title for the solo exhibition came to mind, so we announced it with a provisional promotional poster that read “Title Undecided.” There was the curiosity such a phrase would stir, and a co-director of Arting felt that, given how much chance runs through Joo Boram’s way of stacking thin hand-drawn lines, “Title Undecided” could well have worked as the exhibition title.
Joo Boram’s world — focused on the essentials of form, on shapes like the line, the circle, and the triangle, and on color — is one you take to or don’t on instinct, before weighing its meaning, so “Title Undecided” seemed a workable title. I tend to believe contemporary art feels difficult because of the received idea that a serious meaning hides inside the work. Joo Boram, who has independently developed the fundamentals of form rather than meaning or concept, seemed to me deeply connected to art’s nature as intuition beyond language.
Still, since there clearly exists a line of artists who stake everything on first impressions rather than meaning or concept, I judged it better for the title to foreground Joo Boram’s identity. Her singular color sense and her light, rhythmic surfaces went into one bouncing three-syllable word: Saeksaekkkal Jooboram.
Layering slender lines of color into abstract-like fields, or resolving the image into wide-open eyes, a half-set sun, a rainbow-like semicircle — these are the signature icons across Joo Boram’s chronicle of color.
At the entrance of that chronicle stand figurative paintings that clothe people in uncommon color: figures dressed in the wild, primal palette of Gauguin’s Tahiti years, faces assembled from divided planes in the manner of Picasso, up to the trendy portrait of a modern girl in striking fluorescent color — turquoise face, yellow neck — against a red ground.
If one axis of Joo Boram’s world is her sense of color, the other is a composition of layered lines. Her surfaces read like a tree stump revealing its years — like a cross-section of things — and, further, a representation of their essence.
In the end, Joo Boram’s painting is a totality: a narrow picture plane, thread-thin lines, and a keen sense of color, bound together at high density. Her small world of art is made that way.
p.s. The above is my first-instinct reading of the works, summarized in short sentences before I had seen the artist’s notes. An appendix quoting the artist’s notes (marked “ ”) follows.
“Each drawn line felt like a metaphor for a day, or for a moment.”
RE: It chimes with my own image of the layered color lines as tree rings.
“Many of the paintings set a circle on top of a sharp triangle. Unconsciously, they pin down forever on paper the instant of reaching some summit, some climax. The problem comes when you finally reach the top. After the moment of climax, a descent is always waiting. The question is how to endure the way down.”
RE: Above, I read Joo Boram’s aesthetic as a focus on the basics of form — color and shape — over meaning; but the artist answers that her signature icon of a triangle and a circle also carries her own view of the world.
Installation Views전시 전경
Artist Talk작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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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6 · 아팅 · 진행 반이정 · 31분 6 Apr 2024 · Arting · moderated by Ban E-jung · 31 min · Korean only
전시가 성사된 경위00:03
반이정주보람 개인전 《색색깔 주보람》 작가 대화,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전시가 시작하게 된 것은, 옆에 앉은 주보람 작가가 작년 3월에 아팅에서 《미미미 — 작은 미술 세계》라는 그룹전에 초대된 적이 있어요. 그때 다른 작가들도 호응이 좋긴 좋았는데, 어쨌든 작품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거의 전시가 끝나자마자, 아니 전시 기간 중에 개인전 제안을 제가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이 첫 번째 개인전이에요.
반이정첫 번째 개인전을 열게 됐고 — 제가 전시 평문을 써서 붙이잖아요, 홍보용으로도 쓰고. 그런데 단문들로 구성된 글, 단문 하나하나로도 의미가 있고 총합으로도 의미가 통할 수 있도록 구성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를 했던 것은 — 다른 기획전이나 개인전도 마찬가지로 좀 더 선명한 주제가 있어서 그걸 키워드로 기승전결로 글을 쓰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하나 의미를 따지는 것보다 단번에 직감적인 호오가 갈리는 작업들이 있잖아요. 주보람 작가 같은 경우가 그렇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마치 여러 가벼운 조형들의 총합이 주보람 작업인 것처럼, 제가 볼 때 글도 그렇게 구성하면 어떨까 싶어서 처음으로 단문으로 구성된 전시 서문을 써봤습니다.
이 전시에서 보이는 것01:36
반이정전시된 작업들은 초기작부터 거의 근작까지 다 모아놨는데요. 실선을 층층이 쌓는 것 — 이게 방법론적으로 하나 있고. 그리고 기본 도형. 이게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때는 삼각형이라든지 원형이라든지 선처럼 조형의 기본 단위만으로 작업이 만들어진다는 게 하나의 특징일 것 같고. 그리고 색채 감각을 빼놓을 수 없죠. 초기작에서는 실선이라든지 선 중심의 구성 같은 건 없지만 색채 감각이 되게 중요하죠. 그리고 가장 자주 나오는 건 주파수의 파장처럼 동심원이 겹겹이 쌓이는 구성들이 굉장히 많죠.
반이정작년에 그룹전을 할 때는 용인에 있는 작업실 겸 거주지에 가서 작업을 선별하면서 대표 도상이라고 생각되는 작품만 갖고 왔습니다. 그때 초기 작업을 안 봤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계신 작업들이 저는 인상이 깊어서 그 작업들만 갖고 왔거든요. 이번 첫 개인전의 의미라면, 작년에 봤던 작업 가운데 형상 회화, 인물화를 같이 갖고 왔다는 것이고. 그리고 판매를 기준으로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낯간지럽지만 이번에 수요도 형상 회화 쪽에서 있었어요. 그게 지금의 주보람의 미술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반이정조형의 기본 요소만으로 독창적인 미감을 만든 경우라고 할 수 있고요. 원래 외부 특강을 나가서도 이런 얘기를 자주 하는데 — 구상회화다 추상회화다 나누는 이분법은 되게 남루해요. 좀 남루한데, 그래도 굳이 나눠서 얘기한다면 주보람의 미술 세계는 추상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고 온전히 그 핵심만으로 승부를 거는 게 예술의 추상성이잖아요. 그래서 음악에 추상적인 요소가 많잖아요 — 가사가 있는 음악 말고 연주 음악이요. 그런데 주보람의 미술 세계도 미의 추상성에 주안을 두고 제작된 게 아닌가.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죠. 삼각형이라든지 원형을 동원해서, 어딜 봐도 지평선 혹은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해처럼 보이는 도형들이 있잖아요. 그 얘기는 천천히 나누기로 하죠. 그리고 신작에서 보이는 저 두 눈 작업도 형상이 포함된 추상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죠.
색04:25
반이정서문하고 전시 제목을 짓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런데 작가가 저한테 색을 강조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색색깔'로 이름을 지었는데. 색이 왜 중요시되는지는 우리가 봐서 알 수 있지만, 작가의 입을 통해 한번 듣고 싶은데요. 색이 본인에게 어떤 것인지 얘기를 해볼까요?
주보람일단 저는 진짜 어렸을 때부터 색이라는 조형 요소를 가장 좋아하고 끌려 했고, 그걸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는데요. 각각의 색들에 고유한 매력이 있는데, 특히 제 작업에서는 좀 일부러 가까이에 대비가 심한 색들을 배치시키는 것으로 저만의 색감을 만들어 나간 편이 있거든요.
반이정대비가 심한 색이라면 보색이요?
주보람네, 보색이요. 색채 대비.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는 게 — 예를 들어서 파란색이 초록색 옆에 있으면 두 색이 비슷하니까 서로 합쳐지잖아요. 한 색으로 인식되거나 그냥 그라데이션으로 인식되는데, 서로 대비되는 색이 부딪히면서 있다 보면 리듬감도 생기고 음악적 요소도 생기고, 이게 서로를 돋보이게 만들어요. 노란색도 돋보이고 파란색도 돋보이고 빨간색도 돋보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모든 색들이 다 자기 주장을 하게 되거든요. 여러 색이 동시에 자기 주장을 하게 만들어서 — 가능하면 많은 색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색이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조형 요소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창작하는 태도06:34
반이정작가 노트도, 아주 길지는 않지만 세 가지 정도 보내주셨는데 — 제가 요청해서 받은 거예요. 작가 세계를 요약해서 말로 한번 해줄 수 있어요? 저는 물론 봤지만 청중은 못 들었으니까. 본인의 미술 세계, 혹은 본인에게 미술 창작이 의미하는 바. 꼭 작가 노트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얘기해도 되고요.
주보람일단 창작하는 태도를 말씀드리면, 이런 작업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작가의 의도가 있되 꼭 필요한 요소들만 있고 나머지를 최대한 비워내서, 관객 그러니까 감상자들이 그 틈으로 통과해 나갈 수 있게 만들면 그게 접점이 생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주보람그리고 또 하나의 태도가 — 제 작업은 저랑 딱 붙어 있는 면이 없지 않은데. 저는 솔직한 예술이 개인적으로는 관객한테 더 설득되고 감동을 줄 수 있다, 더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그래서 예술가가 삶을 솔직하게 살아야지 예술도 솔직하게 나온다는 믿음도 개인적으로 갖고 있고.
주보람작품 세계로 말씀드리면, 라인 드로잉 시리즈로 계속 밀고 나가는 그 시리즈 작업이 줄기처럼 있고, 구상이라든가 인물화라든가 다른 요소들 같은 경우는 서브 작업으로 같이 진행시켜 나가면서 서로 교환을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자화상08:33
반이정그런데 시기적으로 봤을 때 저 형상 회화는 초기에 있었지, 그 이후에는 없다시피 했잖아요.
주보람없다시피 하진 않았어요.
반이정어떤 작업이 있죠, 예를 들어서?
주보람초상화 같은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 제 자화상을 그려나가고 있고요. 인물화는 그런 식으로 따로 모으는 게 있긴 한데.
반이정형상 회화가 있긴 있다, 근데 그게 자화상이다. 인물상 모델이 거의 대부분 자화상인데 — 이거야 자기 마음이긴 하지만, 자화상을 인물상의 모델로 꼭 정하는 이유가 있나요? 게다가 자화상이 하나도 자기를 안 닮았는데. 그 이유를 좀 설명해 주세요. 저기 있는 게 다 자화상이래요.
주보람저는 진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림 그릴 때마다 정말 다른 그림이 나오거든요. 자화상을 그려도. 그때그때마다 저의 상태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여러 가지 무드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제가 주기적으로 인물화, 특히 자화상을 그린다고 말씀드린 게 — 엄청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화상을 쫙 모아놨을 때,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변화무쌍한 모습이 거의 다른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것들이 한눈에 '이게 같은 사람이다'라고 보였을 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가 궁금했어요. 그리고 제가 의식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좀 더 다르게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 다르게 그림들이 나온 게 오히려 즐겁더라고요.
반이정그런데 다른 사람을 모델로 해서 그린 적은 없나요?
주보람그렇진 않죠. 있긴 있죠.
반이정많이 있어요? 내가 본 것만 자화상인가 보다.
눈 시리즈, 그리고 시선의 공포10:24
반이정그러면 아예 특정 작업을 지목해서, 그 작업에서 노린 효과 혹은 제작 과정에 대해 물어볼게요. 우리 뒤에 있는 저게 「The Eyes」 눈 시리즈잖아요. 2023년부터 올해까지 제작된 작업들인데, 중층적으로 선을 그려서 만들었다는 방법론은 과거와 같은데 눈을 드러낸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저 작업의 의도, 혹은 사람들이 봤을 때 어떤 효과를 노렸는지 얘기해 볼까요? 작년에 갔을 때는 저 작업을 못 봤죠.
주보람네, 맞아요. 저는 일단 제 신체 부위에서 눈 중심 인간이긴 해요. 시각 중심 인간이긴 해요. 그래서 시각 예술을 하기도 했지만, 제 시선이 좀 직선적이라는 얘기도 많이 듣고, 몰입도가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볼 때 눈을 한 명 한 명 이렇게 보는 면도 있고.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도 손으로 그린다고 하지만 저는 눈으로 그리는 편이거든요. 눈이 먼저 가고 손이 그걸 재현하는 느낌으로. 그래서 저한테 눈이 중요한 상징적 요소인데.
주보람너무 개인적인 동기도 약간 있긴 한데 — 어느 순간부터 이게, 제가 항상 시각 예술을 하기도 하고 관찰을 많이 하면서 살다 보니까, 관찰자가 대상에 비해서 좀 더 권력을 누린다고 하잖아요, 시선의 권력. 그거를 누리면서 살다가 어느 순간 '아, 이게 시선이라는 게 상대적이구나'. 내가 이 사람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도 나를 볼 수밖에 없다. 저 멀리 산에 있는 어떤 사람을 보면, 저 멀리 산에 있는 사람도 제가 보이는 거예요. 그걸 딱 인지한 순간 저는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어요. '아, 이게 나만 보는 게 아니네.' 그래서 개인적인 이유로는 그런 시선에 대한 공포라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런 것들을 좀 한 것도 있어요. 개인적인 감정선에서는.
주보람그래서 저 새와 눈이 있는 작업도 대표적으로 그런 시선 공포증이라든가 시선, 눈에 대한 초기작 중 하나인데.
반이정아, 새 주변에 있는 게 눈인지 모르고 봤네요.
주보람[새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메 눈으로 약간 추상화했어요. 집에 매 모양의 박제가 있어요. 집에 박제가 많아요. 새들 눈이 동그랗고 어디를 보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박제가 제 눈높이 위치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계속 지나갈 때마다 눈이 마주쳐가지고 — 무생물, 그러니까 무생물은 아니죠, 생물이었지만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인데도 너무 많은 에너지라고 해야 되나, 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저를 투사해서 저 그림을 그리게 됐던 것 같아요.
Perfect Circle: 태도를 작업으로 만들기14:02
반이정또 작품 하나를 지목해서 얘기하면, 저 깨진 벽 바로 옆에 원형 두 개가 걸려 있거든요. 그게 「Perfect Circle」, 완벽한 원형이라는 제목이겠죠. 이게 제작 연도가 좀 돼요, 2017년에 만들어진 건데.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그린 거라고 하고,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그려나간 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반복적이고 동일한 수행을 반복하는 작업들이 많은데, 그 제작 과정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고.
주보람이 모든 작업 중에서 저 작업이 라인 시리즈의 가장 처음 작업, 첫 작업이에요. 저 작업을 할 때만 해도 제가 작업적으로 힘든 슬럼프 시기에 있었을 때였는데, 너무 잘하려는 강박이 심해서 작업을 시작을 못하는 시기에 만든 — 그러니까 작업을 하기 위해서, '그럼 완벽에 대한 것을 주제로 만들면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도 자체를 작업화한 거죠.
주보람그래서 — 원형이라는 게 가장 완전한 도형이라고 하거든요. 우주도 원형, 그러니까 행성도 원형이고 비누방울도 원형이고. 원형인 이유가 가장 안정적인 형태이기 때문이거든요. 이거를 저 작업은 볼펜으로,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최대한 똑같이 반복해서 그려나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려나가다 보면 — 이게 근데 사람이 불완전해요. 손도 떨리고. 똑같이 그걸 반복을 하다 보면 그 오차가 점점 커지거든요. 그러다 보면 처음에 그 완벽했던 원이 점점 일그러지게 되는데, 그 과정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겠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완전한 것일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고요.
주보람그리고 일부러 저건 두 점을 —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간 거랑 밖에서부터 안으로 그려나간 거랑, 그 두 작업을 딱 세트로 배치를 한 게 — 똑같이 완벽을 추구해서 그려나가더라도 어떤 태도나 방향성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는 걸 그냥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시작을 하게 됐어요.
반이정그런 작업 태도라든지 작업 방법론이 지금 실선을 층층이 쌓는 작업에 연장돼서 다 반영이 되는 걸 테죠.
물방울: 숨이 막혀서 깨뜨린 것16:47
반이정그러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불안정성 때문에 생기는 선과 선 간의 겹침도 있고 그럴 거 아니에요. 원래는 겹치지 않게 그려야 되는데. 그런 의도로, 예를 들어 여기다가 물방울 같은 걸 떨어뜨린 작업들도 그런 건가요? 물방울 떨어뜨린 작업이 여기 세 점 정도 있거든요. 의도적으로 물을 떨어뜨려서 다 완성된 것에 번짐을 만들었잖아요. 그 의도도 좀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주보람이 작업 같은 경우에는 저 라인을 그렸을 때 이게 숨이 막혀 보이더라고요. 안 그래도 도상이 산 위에 원형이 정 가운데 걸려 있는 도상인데, 삼각형이. 저 정점을 향해 라인들을 하다 보니까 숨이 막히기도 하고 너무 불안정해 보여서 — 이거를 좀 깨뜨리고 싶어서 우연성을 좀 넣으려고 했던 거고요.
주보람나머지 두 작업은 색실선으로 한 건데, 더 얇게 여러 가지 색이 있는 것들. 저거 같은 경우에는 좀 더 리듬감, 음악적인 요소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여러 색이니까 — 이 작업이랑 다르게, 거기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위에 있는 선이랑 아래 있는 선이 물방울 있는 데서 섞여서 제3의 색이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이 약간 변주가 되기도 하고. 그리고 선들은 이렇게 있고 거기에 동그라미가 있으니까 약간 악보 같기도 하더라고요. 악보 위에 음표 같기도. 그래서 저런 실험도 했던 것 같아요.
1년, 그리고 큰 작업18:36
반이정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작년 3월 《미미미》 이후에 개인전 제안을 해서 전시를 하게 됐는데, 그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볼 때, 용인에 가서 먼저 작업을 선별해서 이번에 출품이 결정된 건데 — 신작 수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럴까요? 도자가 있고, 눈이 있고, 큰 작업이 있잖아요. 1년 치고는 진도가 안 나간 이유가 뭐였죠?
주보람진도가 안 나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 도자기가 한 작업이 나오는 데, 제가 3개월 4개월 정도 도자 작업에만 매진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만들고 굽고 재벌하고 이런 작업 때문에 회화 작업 같은 경우에는 수가 줄어든 것 같고요. 저는 엄청 다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반이정용인에 가서 봤을 때 이런 게 있었어요. 작품 선별할 때, 이게 50호인가요? 50호 작업이 3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제가 하나만 선택해서 갖고 온 건데 — 지금 주보람이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이력으로 봤을 때는 큰 작업이 어울리지는 않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나머지 2점은 선택하지 않았죠. 아무튼 큰 작업을 3점 했기 때문에 하나를 갖고 오게 된 거고. 작은 작업을 크게 확대한다고 해서 미적 효과까지 같이 따라가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반이정그래서 용인에서 만났을 때 예를 들어서 — 아주 적절한 예는 아니에요 — 소설가 가운데 레이먼드 카버라는 사람이 있어요. 체구가 되게 건장한 소설가인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게 좋아하는 소설가죠. 이분은 단편 소설만 써요. 그런데 단편 소설을 너무나 잘 써요. 그래서 단편 소설 가운데 「숏컷」이지 아마 —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하고. 꼭 잘 만들어진 소설만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 물론 아닙니다만, 이 소설이 하나하나 정말 놓칠 수 없을 정도로 다 좋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거에 비유해서 — 물론 큰 작업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죠. 근데 지금 현재의 미적 태도를 유지하는 방식의 결과물이라면, 사이즈를 키우는 게 어울리는 그릇 같지는 않다는 얘기죠. 이런 의견은 제가 좀 말씀드릴 필요가 있어서. 저는 질문과 제 생각을 많이 말씀드렸고, 지금 앉아 계신 분들의 질문을 좀 받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한 호흡21:21
주보람그거에 대한 대답은 — 저는 작업을 할 때 정말 한 호흡에 시작을 해서 끝내야지만 그게 저한테 리듬이 맞는 것 같아요. 한자리에 앉아서 완성할 때까지 해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예를 들어서 저 벽면에 있는 「Two Mountains」 같은 경우도 한쪽은 집에서 그리고 한쪽은 다음 날 작업실에서 그리고 해서, 우연히 그 모서리에 있는 라인이 딱 만나게 돼서 그렇게 전시를 하게 된 건데. 저런, 어떻게 보면 작은 기적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제가 그 순간에 엄청나게 몰입해서 집중을 해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런 우연이 생긴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주보람그러다 보니까 큰 작업이 됐을 경우 그 몰입감이 — 다음 날에 작업을 이어서 하고, 이렇게 한 달씩 늘어지다 보면 그때 심상이라든가 집중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특히 이게 라인 작업이기 때문에 라인의 간격과 밀도가 다음 날 다른 상태로, 다른 시간에 했을 때 달라질 수밖에 없거든요.
반이정그걸 의도했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앞뒤 흐름이 끊어지는 거 맞네요. 큰 작업을 했을 때는.
주보람그렇죠. 그래서 어떤 분은 — 부적 그리는 무당들 같은 경우에는 한 번에 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거랑 좀 태도가 비슷하다고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반이정근데 질문을 받다 보니 갑자기 그때 용인에서 왔을 때 생각이 나서 — 주변에서 누군지 모르겠지만 큰 작업을 해보라고 얘기를 해서 큰 작업을 했다고 그랬잖아요. 누가 그런 조언을 했을까요?
주보람아주 많은 분들이.
반이정왜 그런 조언을 했을까요?
주보람제 그림을 봤을 때 더 큰 줄 알았다, 큰 작업을 하면 더 압도될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해주셨던 것 같아요.
라인의 의미 (관객 질문)23:47
관객작가님이 이렇게 라인을 쭉 따라서 그리는 게 되게 반복적인데, 저는 그게 겹쳐서 어떤 입체감을 주는 부분이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입체감을 의도한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어떤 입체감을 주는 부분이 흥미롭고. 그다음에, 어쨌든 이 라인을 쭉 따라 그리는 행위가 작가님한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 시간성 이런 것과 관련해서 라인의 의미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주보람수많은 조형 요소가 있잖아요. 선도 있고 점도 있고 면도 있고 색도 있는데 — 물론 색이랑 결합되어 있긴 하지만, 선을 그릴 때 제가 작업을 하면서 많이 느끼는 거는 이게 흐름이라는 것. 한 선 한 선도 흐름이고, 이 선들이 이어져 있는 것도 흐름이고, 그것들이 만들어서 리듬이 만들어지면서 아까 말씀하신 입체감이라든가 예상치 못한 형태가 만들어지는 건데.
주보람그게 저는 초기에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했던 의도에서 더 확장돼서, 지금은 강박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 지금의 저한테는 라인을 그릴 때마다 그때그때 삶의 순간들이 쌓이는 것의 비유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따라 어떤 떨림이라든가 그런 게 그대로 반영이 되고, 집중을 못하면 집중을 못하는 게 그대로 반영되고.
주보람그리고 이 작업들을 하면서 그런 순간순간이 쌓이는 것에 대해 배우는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에서도.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선은 제가 한 번에 그리기 때문에 지울 수가 없고, 그러니까 과거의 실패라든가 오류라든가 그런 것들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삐침이라든가 손떨림을 이용해서 — 삐쳤으면 삐친 대로, 떨렸으면 떨리는 대로 — 그다음에 그냥 그 모양 그대로 또 이어나가면 오히려 그게 다른 모양을 만들면서 아름답게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를 받아들이고 지금에 머무르면서,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그거를 그냥 수긍하는 태도를 저한테 가르쳐준 작업인 것 같아요.
주보람그래서 라인 작업을 시리즈로 하는 게 — 이것만 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초상도 하고 색이랑 라인이랑 이것저것 하면서 좀 더 작품 세계를 확보해 나가려고 하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저를 단련하고 수행하기 위해서 약간 일기처럼 하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평면 너머, 그리고 「첫 장의 무게」26:55
반이정마지막으로 저도 질문할 게 있었네요. 캔버스, 그러니까 평면으로 얘기하죠 — 평면 작업을 넘어서는 시도가 있어 왔잖아요. 도자도 그렇고 이번에 낸 도자도 그렇고. 저는 물론 구작이지만 2019년에 책을 파낸 작업도 사실 있어요. 파냈다고 표현했지만 책이 이렇게 들어갔죠, 피라미드처럼. 작년에 주보람 작가가 그룹전을 두 군데에서 했습니다. 두 군데 다 가서 봤죠. 두 군데 모두 이런 단순한 평면 작업은 아니었어요. 수행적인 퍼포먼스도 하나 있었고 — 약간 싱거운 퍼포먼스였지만 그게 있었는데, 캔버스 밖으로 넘어가려는 의도가 있는 거죠. 그걸 조금만 더 덧붙여서 얘기하면서 마무리할까요? 아니면 책 작업 같은 경우는 어떤 의도로 — 물론 일반적인, 층층이 쌓은 실선 회화의 연장에 있는 건 우리가 알겠는데 훨씬 더 노동집약적으로 작업을 했잖아요. 2019년 작업이니까 햇수로 벌써 5년 전인데, 저 작업의 취지하고 제작 과정을 좀 얘기해 주고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주보람일단 먼저 책 작업을 설명하기 전에 — 평면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 왔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막 적극적이지는 않은 게, 흰색 젯소 작업, 겹겹이 칠한 작업도 미미한 층으로 입체가 되잖아요. 그리고 저 책 작업 같은 것도 얇은 종이로 인해서 미미하게 입체가 되고 약간 파 들어가고, 저 색종이 작업도 미미하게 입체인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되는 식으로. 도자도 심지어 네모나죠.
주보람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평생 그림을 그려왔고, 하지만 매체를 확장시키고 싶은 욕망은 항상 있어 왔거든요. 그림밖에 못 그려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다른 작업들도 할 수 있는데 주력이 그림인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작업 같은 경우에는 좀 입체화됐을 때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다른 확장성을 가질 수 있고, 그랬을 때 어떤 시각적 효과를 가지고 오고, 어떻게 물성이 달라지느냐, 재료에 따라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느냐, 이런 것에 대해서 좀 하고 싶었고요.
주보람책 작업 같은 경우에는 — 저 작업을 할 때만 해도, 그러니까 아까 그 원형 캔버스도 그렇고 저 일자에서 시작한 「Two Mountains」 작업도 그렇고, 원래는 그런 완전한 직선, 완전한 원 그런 거를 약간 틀이나 한계의 비유로 해서 작업을 시작을 했거든요. 그래서 책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책의 프레임이라든가 혹은 책이 갖고 있는 언어성 — 언어도 프레임이죠. 언어도 프레임이고 그것이 갖고 있는 관념이라는 게 있고. 그런 것들이 저한테 그 당시에 너무 무거웠던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파내려가면서 무게도 표현하고 싶었고요.
주보람예를 들어서 왼쪽 작업 같은 경우는 제목이 「첫 장의 무게」거든요. 첫 장에서 이렇게 파내려간 작업인데 — 저는 항상 너무 완벽하게 책 한 권을 읽으려다가, 첫 장을 완벽하게 읽으려다가 힘 빠져서 못 읽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첫 장만 새까매지는 거예요. 책장에 있는 모든 책들이. 많은 사람의 경험이죠.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인해서, 이거를 종이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 책도 종이긴 하지만 — 그걸로 이렇게 파내려갔을 때 또 다른 의미가 만들어질 수 있겠고. 그런 것들로 책 시리즈를 몇 개 했던 것 같아요.
반이정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잘해 주네요. 작가 대화가 끝난 다음에 또 작가랑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작가 대화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